음반부터 카페까지,
치열하게 건설된 메종 키츠네의 세계
여우는 매우 영민한 동물입니다. 각 문화권마다 ‘여우’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똑똑하고 교활한 면이 있으며 사람을 매혹시킨다는 이미지가 있죠. 동아시아권에서는 특히 여우가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모한다는 설화들이 존재합니다. 폭스 엠블럼이 특징인 ‘메종 키츠네(Maison Kitsuné)’는 일본어로 여우를 뜻하는 ‘키츠네(きつね)’에서 알 수 있듯이 변신에 능한 여우를 통해 브랜드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는 두 명의 창립자, 질다스 로웩(Gildas Loaëc)과 마사야 쿠로키(Masaya Kuroki)의 아이디어죠.
두 창립자의 운명적인 만남
프랑스 서부 지역인 브리타니에서 1973년 태어난 질다스 로웩은 19세에 '파리에 가면 무엇이든지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무작정 상경해 '스트리트 사운드(Street Sounds)'라는 음반 가게를 오픈합니다. 그의 레코드숍은 곧 감각적인 음반 셀렉션으로 하우스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탔어요. 1993년부터 활약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일렉트로니카 그룹, 다프트 펑크(Daft Punk)도 이 곳의 단골 손님이었죠.
한편 그의 파트너, 마사야 쿠로키는 1975년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이혼을 겪고, 10세에 유화 작가인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이국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청소년기의 마사야는 스케이드 보드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우연히도 그가 좋아하던 파리의 유명한 스케이드숍이 바로 질다스의 레코드 가게 앞에 있었습니다. 당시 힙한 사람들이 모여있던 그 거리에서 질다스와 마사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죠.
마사야는 스트리트 문화에 심취해 1990년대 힙스터들의 성지였던 뉴욕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갭이어로 떠난 뉴욕에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같은 건축물들에 매료돼 건축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합니다. 건축학도로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그 아이디어를 구현해 고객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한 마디로, 브랜딩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거죠.
질다스도 큰 변화를 겪습니다. 음악에 대한 감각은 탁월했지만, 사업에는 소질이 없다고 느꼈던 그는 레코드숍을 접고 다프트 펑크의 일을 도와주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매니징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다프트 펑크와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공연과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질다스는 마케팅을 비롯해 다양한 것을 배웁니다.
메종 키츠네의 서막
다프트 펑크가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인터스텔라 555>의 제작을 위해 일본에 가게 되자, 질다스는 마사야에게 일본어 통역을 부탁합니다. 당시 마사야는 졸업 후 건축회사인 '아뜰리에 장 누벨(Ateliers Jean Nouvel)'의 어시스턴트로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낮은 봉급으로 인해 빈티지 옷 매장에서 주말 알바를 하며 월세를 내고 있었습니다. 패션과 음악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이때부터죠.
일본에서의 다프트 펑크 일정을 함께 하던 질다스와 마사야는 서로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둘 다 음악을 좋아했고, 질다스는 다프트 펑크와의 일을 통해, 그리고 마사야는 빈티지 샵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패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거죠. 일본의 독특한 콘셉트 스토어들은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기 충분했습니다. DJ이자 프로듀서, 패션 디자이너인 나가오 토모야키(니고)가 1993년 론칭한 베이프(BAPE, A Bathing Ape)라는 스트리트 브랜드는 두 사람에게 지향점과도 같은 존재였어요. 니고는 베이프를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커피숍도 운영하고, 아티스트들을 후원했기 때문이죠. 그들은 곧 '파리 버전의 베이프를 만들자'를 목표로 세우게 됩니다.
2002년 둘은 파리에서 아티스트들과 함께 '메종 키츠네' 음반 레이블을 설립, 음악을 발표하면서 브랜드를 시작합니다. 일본의 여우 설화에 기반해, 브랜드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자 이름에 여우를 뜻하는 ‘키츠네’를 넣었죠. 의상 제작 경험이 전무했던 질다스와 마사야는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제조 업체들을 만나며 컬렉션을 차근히 준비해 나갔어요.
마침내 2005년, 폴로 셔츠와 카디건, 데님 팬츠로 구성된 첫 컬렉션을 공개합니다. 그리고 메종 키츠네를 알리기 위해 전세계의 DJ들을 초빙해 디제잉을 시작하죠. 낮에는 업체들과 제품 판매에 대한 논의를 하고, 저녁에는 그들을 키츠네 파티에 초대했어요. 곧 메종 키츠네는 전세계인들에게 독보적인 여우 엠블럼과 디제잉 파티로 각인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패션 브랜드로서의 도약
2016년부터 컬렉션을 한층 더 발전시킨 메종 키츠네는 내부 디자인팀을 키워 패션 시장에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2018년 한국계 디자이너인 유니 안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죠. 센트럴 세인트 마틴 재학시절 스텔라 맥카트니에 스카우트된 이력을 시작으로 끌로에와 미우미우, 폴 스미스, 셀린에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키츠네와는 파리의 팔레 루아얄 정원에 위치한 카페 키츠네에서 질다스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친분을 이어왔죠.
유니 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데뷔 무대였던 2019 F/W 컬렉션은 메종 키츠네의 뿌리와도 같은 1990년대와 하우스 음악을 콘셉트로 전개했습니다. 키츠네만의 음악적 감각과 두 창립자가 만들어온 연결 고리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한다고 생각한 거죠. 글로벌 뮤직 플랫폼인 '보일러 룸'과 협업해 마치 클럽에서 파티를 즐기는 듯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어요.
세 시즌을 함께 한 유니 안 이후, 메종 키츠네는 2021년 마커스 클레이튼을 수장으로 임명합니다. 그 역시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해 장 폴 고티에, 루이비통, 발망 하우스를 거쳐 리한나의 패션 브랜드인 펜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을 자랑하는데요. 메종 키츠네에서도 게스트 디자이너로서 활약하다 2020년부터 정식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브랜드 창립 20주년을 맞아 데뷔 무대였던 2022 F/W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이끕니다. 키츠네의 DNA에 충실한 일본의 스트리트 스타일과 프랑스의 고급스러운 무드를 조화롭게 풀어냈는데요. 세련된 실루엣에 일상에서도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실용성까지 갖춘 아이템들을 대거 선보였습니다.
무궁무진한 컬래버레이션
메종 키츠네는 협업에도 진심입니다. 패션 브랜드 뿐만 아니라, 화장품, 향수, 인테리어, 캠핑 등 다양한 브랜드는 물론 라인 프렌즈와 같은 캐릭터와도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죠. 키츠네의 상징적인 여우 엠블럼은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출시와 함께 큰 인기를 끕니다. 다양하게 변모하는 여우 엠블럼을 찾아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예요.
디제잉으로 키츠네를 홍보하던 시절부터 서울을 사랑했던 질다스와 마사야는 한국 기업과도 다양한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국내 브랜드 아더 에러와는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컬래버레이션 라인을 출시할 정도죠. 2021년에는 라인 프렌즈와 삼성전자, 그리고 뷰티 브랜드 라네즈와 협업해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브랜드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도 합니다.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마커스 클레이튼은 물론, 질다스의 친구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올림피아 르탱(Olympia Le-Tan)이 게스트 디자이너로 참여해 캡슐 컬렉션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2022년 'A Fox Day Afternoon'과 'Daytime Tails'라는 콘셉트로 두 번에 걸쳐 선보였는데, 올림피아 르탱만의 톡톡 튀는 색감과 서정적인 시각이 돋보였어요. 지난 9월 16일에는 AI 아티스트, 조안(Joann)이 키츠네의 바시티 재킷을 활용해 제작한 아트워크를 공식 인스타그램에 공개했습니다.
메종 키츠네의 넥스트 레벨은
사실 메종 키츠네는 패션만 언급하기에는 부족한 브랜드입니다. 레이블 창립 당시, '키츠네라는 이름 아래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두 창립자의 바람대로 메종 키츠네는 카페 사업까지 진출했으니까요. 2013년에는 도쿄에 첫 카페, 카페 키츠네(Café Kitsuné)를 오픈한 이후, 현재 유럽과 북미, 중동, 아시아에 걸쳐 27개의 매장을 갖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2018년 신사동에 처음으로 카페 키츠네 서울을 오픈한 이후, 현대백화점 목동점과 판교점 그리고 부산에 위치한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등 총 네 곳의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키츠네 레이블의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죠.
물론 키츠네는 음악과 패션 뿐만 아니라 커피에도 진심입니다. 2019년에는 오코야마에 로스터리를 세울 정도로 질 좋은 커피에 대한 키츠네만의 철학을 보여줬어요. 2019년에는 파리에 레스토랑까지 갖춘 카페 키츠네 루브르점을 오픈했고, 2021년에는 베르부아 지구에 유럽에서 유일하게 로스팅 아틀리에를 갖춘 카페 키츠네를 열어 커피 문화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개최되는 이 워크숍은 스페셜티 커피를 탐구하는 네 단계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며 최대 6명의 소수 인원으로만 진행된다고 해요.
메종 키츠네의 근간인 음악도 빠질 수 없죠. 키츠네의 음악 레이블, 키츠네 뮤직(Kitsuné Musique) 은 디지털 음반도 출시하지만, 신예 아티스트들을 선발해 그들이 음악 산업으로 진입할 때 이끌어주는 것을 핵심 철학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소프트 록과 디스코 풍의 음악을 만드는 호주 출신의 프로듀서 무난(Munan), 뉴질랜드의 힙합 신의 떠오르는 스타로 언급되는 한스(Hans) 등 한국계 아티스트들도 키츠네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음악과 패션의 결합에 이어, 카페와 레스토랑까지. 과연 메종 키츠네가 생각하는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질다스와 마사야 듀오가 그리는 메종 키츠네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입니다.